어떻게 생각하면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재미있고 신나는 일도 많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아픔들이 잠재되어 있다.
우리 동네에는 단물이 나오는 곳, 즉 용천수가 흘러나오는 곳이 4-5군데나 된다.
그 각각에는 이름이 있다. 고랫물, 쇠물, 어른목욕탕,... 이런 식으로...
고랫물은 옛날에 고래가 들어왔었다고 해서 고랫물이 되었고,
쇠물은 소를 물 먹였었다고 해서 쇠물이 된 걸로 알고 있다...
어른 목욕탕은 남자 어른들이 목욕하는 곳이라서 어른 목욕탕이라고 불리었고,
여자들은 보통 담으로 둘러쳐진 "고랫물"에서 목욕을 했다.
내가 세 살이었을 때,
어른 목욕탕에 빠져서 죽을 뻔했다고 어머니는 가끔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리고 이름이 "계숙"이라는 사람이 건져주었다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지만, 그 때 내가 죽었다면... 하고 상상해 볼 때가 많다.
물가에 사는 애들은 세 네 살 정도가 되면 수영을 하기 시작한다.
특별히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물이 얕은 곳에서 세수 대야를 갖고 놀면서
자연스레 수영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두 팔은 돌을 짚고 다리만 움직여 보고... 그러다가 조금씩 깊은 물가로 나가게 된다.
튜브가 귀하던 시절이라 세수 대야를 엎어놓고 튜브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고랫물에서 우리는 수영을 배웠다.
고랫물은 우리가 수영을 배우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적당하게 짚고 다리를 움직여 물살을 가를 수 있었고
단계별로 수영을 배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여름이면 어른들이 물가 그늘에 나와 앉아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애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터가 바다였기 때문에
초등학생이 되어도 수영을 못하면 그 애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바닷가에 사는 애들은 수영을 못하는 애가 거의 없었다.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그 고랫물에서 동네 아이가 빠져 죽었다.
내가 보기엔 빠져 죽을 만한 물이 아니었는데, 수영을 잘 못했었나 보다...
그 애는 내가 볼 때, 남자인데도 눈이 사슴 눈처럼 맑았고,
얼굴은 조금 이국적이면서도 예쁘다 싶은 아이였다.
아마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정도 되었을까... 죽은 자식을 앞에 두고 그 부모는 오열했다.
그래도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어린 나도 알 것 같았다.
그 때 내가 느낀 죽음이라는 것은,
무섭다기보다는 두려움, 막막함, 답답함이었다고나 할까...
그 집은 그 후로도 자식을 5,6명은 더 낳았다.
그 애를 잊지 못하는 슬픔과 허전함을 자식을 더 낳음으로써 채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큰애가 중·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집에는 젖먹이 아기가 있었다.
그 분들은 그 애를 잊고 잘 살아 가는 지 모르겠다.
난, 어쩌다 길에서 그 분들을 대하면 죽은 그 애가 생각이 난다.
그러면서 속으로 '저 분들이 지금은 그 애를 잊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이 또렷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 애의 죽음이 나에게 충격이었나 보다.
내 키의 두 세배만큼이나 물이 가득 들었을 때, 내 또래의 애가 물에 빠졌다...
수영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나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 애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도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어른이 와서 그 애를 구해서 살아나긴 했지만,
그 애를 구하기에는 능력부족이라는 것을 그 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달리 생각해 보면, 수영을 잘한다는 생각만 들었어도
물에 빠져 그 애를 구하려다가 같이 죽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듯 바닷가에 산다는 것은 죽기가 쉽다는 얘기도 된다.
나처럼 아버지를 일찍 여의거나 해녀였던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애들도 있었다.
그래서 부모없이 할머니와 사는 집 아이들은 바닷가에 살면서도
물에서 노는 게 쉽지도 않았고, 수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애들이 안타까웠다.
수영을 하고 싶은데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못하는 그 마음이...
바닷가에 살아서 좋은 것은...
중요한 먹을 것을 비롯해서 우리에게 놀이터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썰물이 되어서 물의 바닥이 드러나면 보통 조개를 파러 다녔다.
돌 사이의 갯벌 비슷한 곳을 골갱이(호미)로 파보면 무늬가 아름다운 조개들이 나오곤 했다.
보통은 삶아서 먹었지만, 삶으면 조개의 크기에 비해서 먹어볼 것이 없었다.
조개는 보통 재미 삼아 파보는 게 고작이다.
보통 가까운 바닷가에는 길다란 보말(고동)들이 많았다.
삶아서 돌로 끝을 쳐서 빨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것과도 비슷한데 우리 동네 바닷가에서 나는 것들은 보말 표면에 무늬가 없다.
이 보말을 삶아서 물기를 뺀 다음,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아무데서나 돌로 끝을 쳐서 먹곤 했다.
이것이 우리의 여름철 간식이었다.
가끔, 바닷물이 멀리까지 밀려날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활동영역이 넓어져서 많은 것들을 캘 수 있었다.
그런 날은 골갱이와 칼을 바구니에다 넣고 보말을 잡으러 간다.
소도리보말, 먹보말, 기름보말,... 보말만 잡는 것이 아니라...
쟁바람, 비말, 성게, 구쟁기(소라), 오분자기 등을 잡는다.
가끔 미역과 톳을 할 때도 있다.
보말은 삶아서 반찬을 하기도 하고 바늘로 까서 먹기도 한다.
성게는 바위를 들어올리면 그 아래 있거나, 돌 사이에 있어서 골갱이로 파내야 나온다.
성게는 색깔과 모양으로 구별해 보면 두 종류다.
하나는 검보라색상의 키가시가 긴것과 또 하나는 가시가 짧으면서도 카키색을 띤 것이다.
성게는 날로 먹기도 하지만, 삶아서도 먹는다.
성게를 보말과 같이 넣어서 삶으면 그 물이 짙은 보라색으로 된다.
내가 느끼기엔 날로 먹는 게 더 달고 맛있다.
삶은 성게는 반을 쪼개 그 안에 내장을 빼고 주황색으로 된것만 파먹으면 된다.
지금은 잔치를 하는 집에서 성게국을 끓이는데
귀한 손님에게 대접을 하는 것을 보면 귀하긴 귀한 것인가 보다.
구쟁기(소라)는 지금도 채취해 먹는 게 불법이지만, 그 때도 불법이었다.
바닷가를 가다보면 항상 표지판이 버티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바닷가에서 함부로 채취하면 안 되는 것과
만약 함부로 채취했을 경우에 고발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먹고 싶은 욕망을 누가 막으랴...
아버지와 나는 몰래 구쟁기를 해왔고... 물가에서 돌로 쳐서 생으로 그것을 먹었다.
보통은 보말 잡을 때, 구쟁기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서 먹는다.
이런 것을 해녀가 모를 리가 없다. 알아도 가끔은 눈감아 주었다.
오분자기나 전복을 하는 것도 불법이다.
하지만, 불법이라고 해서 발견할 것을 그냥 놔두는 사람은 없다.
요령껏 숨겨서 집에 갖고 온다. 그리고 그것으로 맛있는 죽을 쑤어서 먹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은 보말하러 가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동네 사람이 아닌 경우는 더 그랬다.
배타적이기도 했지만, 바다에서 보말을 잡은 다음에는 돌을 제자리에 놓는 것도 중요한데
그냥 바다를 헤집어 놓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당을 지키는 할머니가 때론 그런 사람들을 아예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았다.
나는 해녀딸이라는 이유로 그런 제지를 당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많이 하고 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보말 잡은 것을 검사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잡든 검사대상에서 제외였다.
난, 해녀딸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이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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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아는 분의 '나혼자'라는 사진입니다.
화북등대이구요... 화북은 동, 중, 서마을과 거로마을로 나뉘는데...
사진의 배경은 서마을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동마을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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